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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

이지은 | 2007.11.23 15:10 | 조회 2049

사철 꽃이 마르지않는 시골집 마당에는
붉은 목단과 작약이 흐드러지게 피곤 했었다.
그 무렵 신록은 푸르러지고 아카시아 마저 지천으로 피어오르면
온 동네가 그 향기로 가득해 나는 자주 어지럼증을 느끼기도 했었다.
그러나 머지않아 곧, 평상에 나가 누웠는 내 머리 위로
아무렇게나 펼쳐놓은 그림책 위로
마당으로 장독 위로 하얀 감꽃 후두둑 떨어지면
마치 꿈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아득해
나는 오랫동안 무릎을 세워 안은채 먼 산을 바라보았다.


봄비라도 내리고 나면 온 마당은 감꽃이 천지로 나뒹굴었다.
수북하게 쌓인 꽃을 바가지 한 물에 둥둥 띄워 말갛게 헹궈
어린 딸아이 고물고물 작은 입에 넣어주시고는
꽃잎 하나 두울 명주실에 꿰어
목걸이도 만들고 꽃반지도 만들어 끼워주시며
꽃보다 우리딸이 더 이쁘네 더 이뻐
참 고운 소리 많이도 해 주셨던 울 아부지.
중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집을 떠나온 후에도
아부지는 꽃이 피는 때마다 잊지않고 소식을 전해주셨다.

은아, 찔레꽃이 천지로 다 피었더라
은아, 올해는 배꽃이 더 이뿌다이

그 소리가 그 소린줄 나는 왜 이렇게 늦게 알았을까.
꽃 보러 오라는 그 소리가 꽃 보러 오라는 소린줄
나는 어째 그렇게만 알아 먹었을까.
아부지 니 보고싶다,
오랜 세월 내 아버지의 딸로 살아오는 동안
묵묵히 퍼주고 퍼주는 아버지 그 마음을
어쩌면 그렇게 한 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을까.


청춘의 시기를 다 지나오며
한 여자의 남편으로 세 아이들의 아버지로 살아온 그 삼십년 동안
반짝반짝 빛나던 연두빛 봄의 산과도 같던 청년의 남자는
이제 붉은 단풍이 찾아든 가을 산이 되어 내 곁에 서 있다.
그리움은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애틋함의 표현이라 했던가.
아부지 손 잡고 거닐었던 물안개 자욱한 그 강 언덕,
껄껄껄 웃던 아부지 웃음소리
돌아보면 그리운 것들 투성인데
꽃이 피고 꽃이 지는 시간들이 흐르고
먼훗날 그가 없는 빈 자리에,
나 얼마나 수없는 계절을 가슴타는 그리움으로 대신하게 될까.
울 아부지 알뜰히 담아 보내주신 택배 상자를 보며
이만저만 수 가지 생각들이 드는 오늘 아침이다.

'좋은 놈은 까치가 다 쪼아 묵을라 칸다.
많이 보냈응께 버리지 말고 다 묵으라'

우체국서 급하게 적어 보내신 삐뚤삐뚤 쪽지 한장 툭 떨어지니
내 눈물도 툭 떨어져 작은 종이 다 젖는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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